탄원서

저는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이 저의 삶과 노동조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사건의 판결을 주목하고 있는 한 명의 강사로서 간곡한 탄원을 올리고자 합니다.


 한국의 대학에서 시간강사는 대학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보따리장수로 불릴 정도로 매우 열악한 처우와 고용불안에 시달려 왔습니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강의료로 생활해왔고, 6개월마다 반복되는 위촉과 해촉으로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처해 왔습니다.


강의 준비와 연구, 학생지도를 수행하고 있지만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22주의 방학 동안에는 실업자와 다름없이 생활합니다. 십 수년을 한 대학에서 강의해도 직장건강보험 적용은 꿈도 꿀 수 없고 퇴직금 한 푼 받지도 못하고 강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석사과정 2년, 박사과정 3년 그리고 학위논문을 쓰기까지 몇 년의 시간을 들여 전문가로서의 소양을 닦아왔고, 그로써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를 수행해왔지만 대학의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원은 2003년 서울지방법원 2002나55815 판결을 시작으로 지난 20년 동안 여러 판결들을 통해 시간강사의 경우 강의시간의 3배 정도를 소정근로시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리를 확립하면서 그나마 시간강사의 퇴직금 등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법원의 판결들은 열악한 처지에 놓인 시간강사들에게 중요한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지금까지 판례의 경향을 완전히 뒤집어 시간강사의 소정근로시간은 오로지 강의시간만으로 한정된다는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2022나2011720). 이와 같은 법원 판결은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수만 명에 이르는 대학 시간강사들은 이번 판결을 접하고 가히 충격적이고 절망적입니다.

 

시간강사는 강의시간에만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과목을 강의하더라도 이를 위해서는 강의 이외에 사전 강의준비(교재 준비, 교재와 참고문헌 연구, 새로운 강의기법 학습 등), 시험출제와 평가, 과제물의 제시와 평가, 출결 및 성적 처리, 기타 대학이 요구하는 학사행정업무 처리 등 강의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업무에 상당한 시간을 투여합니다. 이는 시간강사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업무들입니다.

 

대학측도 이러한 사정을 모두 인지한 상태에서 시간강사와 임용계약을 체결하는 것이고, 이러한 이유로 시간강사의 퇴직금 등 소송에서 대학측이 시간강사의 소정근로시간이 강의시간만으로 한정된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유독 서울고등법원만이 지금까지의 법원 판결들을 모두 무시하고, 학교현장의 실정 및 계약 당사자들의 의사도 무시한 채 충격적인 판결을 선고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판결입니다.

 

만약 이번 판결이 그대로 확정된다면 앞으로 대학의 시간강사들은 수 십년 동안 근무하고도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하는 매우 부당하고 가혹한 결과에 내몰리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대학측에는 부당한 이득을 주고 시간강사들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야기하는 편향적인 판결입니다.

 

이번 서울고등법원 판결은 구 고등교육법상 ‘시간강사’에 관한 판결이지만 현행 고등교육법상 ‘강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현재 국내 대학에는 수만 명에 이르는 강사들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주당 10시간 미만의 강의를 담당합니다. 만약 이번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그대로 확정된다면 현재 수만 명에 이르는 강사들은 모두 졸지에 초단시간근로자로 취급되어 앞으로 퇴직금 등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번 판결은 대학의 (시간)강사만이 아니라 강의나 교육을 본질적인 업무로 하는 다양한 직종의 근로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매우 큽니다.

 

한편 정부(교육부)는 기존의 법원의 누적된 판례를 반영하여 고등교육법 개정 이후 강의시간이 5시간 이상인 ‘강사’의 경우에는 퇴직금을 지급한다는 방침을 세워 실행하고 있고, 이에 따라 대학들도 현재 강사들에게 이와 같은 방침을 적용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이번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확정된다면 이와 같은 정부와 학교 현장의 행정에도 상당한 혼선이 빚어지고, 자칫 서울고등법원 판결에 따라 퇴직금 지급 방침이 철회된다면 학교측과 강사(강사 노조 포함)와의 갈등이 폭발할 개연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이번 서울고등법원 판결은 법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최고법원인 대법원에서 이와 같은 잘못된 판결을 반드시 바로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열악한 처지에 놓인 (시간)강사 등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이번 판결이 바로잡히지 않을 경우 수만 명의 (시간)강사들, 강의나 교육을 본질적인 업무로 하는 등의 수많은 근로자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고 현명한 판단을 해주기기를 다시 한 번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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