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using Google Docs
<미로> 단편 소설
Updated automatically every 5 minutes

미로

Story by 가은

 툭. 날선 바람이 뺨을 쓸었을 때쯤 몽롱한 정신이 깨어지는 듯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에 잘 뜨이지 않는 눈을 힘주어 떴다. 곧장 시야에 들어온 것은 섬뜩할 정도로 잿빛인 하늘이었다. 나는 그 모양새가 꼭 먼지 쌓인 솜사탕처럼 보여 역했다.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피니 내 키의 다섯 배는 되어 보이는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 온통 생경해서 처음에는 꿈이라고 단정했다. 다만 손 아래 닿는 물의 촉감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꿈과 현실의 경계 어디쯤일 것이라 생각했다.

 몸을 일으킨 나는 매일 오후마다 하늘에 손바닥을 대어 보는 버릇이 있어서, 여느 때처럼 푸르른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마다 울상 짓는 나를 보며 매번 자기 손을 쥐어 주던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네가 상냥한 얼굴로 입꼬리를 말아올리고 있었다. 분명 곁에서 손을 뻗어 오는 그림자를 보았던 것도 같은데, 마디 사이사이 텅 비어 있는 손등을 확인하고서야 실감했다. 네가 없는 꿈이라면 현실과 다를 바 없는데. 나는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일을 관두기로 했다. 그럼에도 잊히지 않았다. 방금 손등 언저리로 느껴졌던 익숙한 온기가, 외로운 손을 잡아 주려는 듯 다가오던 검은 그림자가 낯설지 않아서. 단지 그리움에서 발현된 환영은 아닐 것만 같았다. 그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끝자락이라도 잡아 보려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깡그리 새까만 벽들 사이에서 맞는 길을 찾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차저차 연결되는 길이 있었다. 벽에 부딪쳐 까진 살갗이 아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숨이 가빠 폐가 아릴 때까지 달리면, 그 길목의 끝에 네가 보였다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겨우 따라잡았나 싶으면 재차 멀어진다. 쥐어짜낸 힘으로 속력을 내 코너를 도는데, 안간힘을 쓰며 쫓아오는 나를 골리듯 다시금 모퉁이에 선 네가 있다. 고개 돌린 네가 나를 향해 웃는 것도 같다. 숨 고를 틈 없이 네 그림자 뒤로 따라붙었다. 다급히 귀퉁이를 도니 탁 트인 풍경이 눈앞을 점령했다. 갑갑하게 에워싸고 있던 벽이 끝나는 부근에 양팔을 벌린 네가 멈춰 서서 나를 응시한다. 막상 마주하고 나니 무겁게 휘감는 위압감에 몸이 얼어붙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짧은 새에 닿은 시선이 진득히 얽힌다.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등 돌리는 네가 보였다. 이끌리듯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뵈는 것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데, 갑작스레 비어 버린 바닥에 디딜 곳 잃은 몸이 맥없이 하강했다. 앞으로 보이는 길게 내려온 밧줄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왠지 위로 향하는 네 잔상이 스쳤던 것도 같아서, 그게 꼭 네 그림자의 끝자락이라도 그러쥘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도 되는 듯이. 아등바등 따라 오르려는 순간, 밧줄을 붙든 손아귀로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빳빳이 쳐든 고개로 절단된 밧줄의 상단이 보였다. 뒤늦게 손짓해 보지만 몸은 온 힘 다해 중력을 받아낼 뿐이었다. 추락한다. 내가 안착할 수 있는 밑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두 번째다. 울리듯 화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눈알을 굴려 주위 상황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공간인데, 미묘하게 생소하지만은 않은 밀폐된 방 안. 눈만 끔뻑이며 방을 훑었다. 선반 위에는 중앙선보다도 낮게 물이 차 있는 조그만 어항이 놓여 있었다. 어항 속 구피가 숨이 부족한지 자꾸만 물낯 위로 고개를 쳐들곤 위태롭게 뻐끔거렸다. 나는 애처로운 구피를 빤히 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벽면에는 낡은 벽시계가 다소 비뚤어진 꼴로 자리하고 있다. 시침과 분침이 제 구실을 못하고 열두 시에 가만 멎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 좀 고치라니까. 언젠가 내가 언짢은 얼굴로 그 시계를 가리키며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등 뒤로 흘러든 코에 익은 머스크 향이 찌르듯 정신을 장악했다. 후각은 잠겨 있던 기억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귓가를 가르는 쨍한 굉음. 순간 세상이 암전 되는 듯 저물었다가, 덮여 있던 기억이 번뜩이며 떠올랐다. 내가 못 견디게 사랑했던 말간 얼굴 위로 생기 가신 서늘한 얼굴이 포개어진다. 아득한 눈이 온기 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선물한 꽃이 담긴 유리병을 깨부수곤 허연 손에 핏물을 뚝뚝 흘리며. 자욱한 환각이 사라질 때쯤, 어깨너머로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꼈다. 돌아보지 않아도 너임을 알 수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팔을 쥐려는 듯 덧대어지는 그림자를 거칠게 뿌리쳤다. 눈에 들어온 문 손잡이를 닥치는 대로 당겨 열었다. 연결된 커다란 방 곳곳에 여러 개의 문이 있었다. 머리 굴릴 새 없이 가까운 방문을 열어젖혔다. 끝이 있기는 한 건지, 방을 빠져나와도 같은 풍경이 연속됐다. 제아무리 달아나도 거듭 따라붙는 그림자의 기색에 마른 땀이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나는 너에게 속박되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쉬지 않고 달렸다. 그렇게 손목이 저릴 때까지 문을 여닫기를 반복한 뒤 찾아낸 환한 공간에 내내 움켜쥐고 있던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앞으로 향하려 발을 내딛고서야 알았다. 내가 발견한 건 탈출구가 아니라 벼랑이었다는걸.

 낯선 장소에서 깨나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질끈 감은 눈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서 찬찬히 눈꺼풀을 열었다. 도리어 더 이상 깨어나지 않았으면 싶은 심정까지 들었다. 손바닥에 닿는 까슬한 땅의 감촉. 하다 하다 좁아터진 구덩이였다. 매섭게 나를 추적하던 너의 기척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도망친 건 내 쪽이면서, 너를 완전히 잃었음이 피부로 느껴지자 두려움이 의식을 좀먹었다. 외로움이 사인이라면 질식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희미한 쥐색을 띠고 있던 하늘이 열리듯, 주저앉은 나를 둘러싸고 둥그스름한 빛 한 줄기가 쏟아졌다. 난 그게 살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을 내뻗었다. 쿵. 소란한 소리가 이어지고 땅이 꺼졌다. 나는 여전히 한 쪽 팔을 들어 올린 채 멍한 낯빛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원체 크지 않았던 광적이 시나브로 점이 되어갔다.

구멍난 하늘이 나를 담던 공허한 눈을 닮아 있다. 또 낯익은 체취가 곁을 메운다.

몸은 속절없이 가라앉는데,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그런 생각을 했다.

악착같이 발버둥쳐도 네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면, 결국 숨통 조이고 살아갈 뿐인 거라면.

쫄딱 잠식되어도 네 안이면 숨 참고 배길 수 있겠다고.

결승선은 없고 영영 낭떠러지만 되풀이되는 「미로」 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