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고양이 살처분론 속에 담긴 ‘혐오’

1. “고양이, 이젠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유튜버가 자신의 채널에 위와 같은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약 54만에 가까운 구독자를 둔 그는 길고양이를 유해야생동물이나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해 개체 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고양이를 대대적으로 잡아 죽이고 있으니, 우리도 고양이를 잡아 죽일 법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영상에는 마라도에서 천연기념물 뿔쇠오리가 고양이에게 사냥당하는 장면이 담겼다.

2. 섬과 대륙은 다른 세계다.

그가 든 근거는 모두 섬 환경에서 서식하는 고양이에 관한 것이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마라도. 고양이가 야생동물을 멸종으로 몰아넣는 곳은 압도적으로 섬이다. 보전생물학의 대표적 국제 연구(Medina et al., 2011, Global Change Biology)에 따르면, 섬의 야생 고양이는 전 세계 조류·포유류·파충류 멸종의 최소 14%에 관여했고, 멸종위기종의 약 8%를 위협하는 주범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뉴질랜드의 새들은 수백만 년 동안 포유류 포식자 없이 진화해 날개까지 잃었고, 호주에는 애초에 토종 고양잇과가 없었다. 이런 곳의 동물은 ‘생태적으로 순진한’ 상태다. 천적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 대응할 줄 모른다.

반면, 우리의 생태계는 섬과 다르다. 삵과 담비, 여우, 족제비, 수리부엉이, 참매가 수만 년을 살아온 곳이다. 우리 새와 쥐는 포유류 포식자와 함께 진화하며 이미 방어 형질을 갖췄다. 고양이가 섬에서 멸종을 일으킨다는 것은 다툼이 없는 사실이지만, 대륙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명확히 정립된 바 없다. 실제로 학계는 호주·뉴질랜드처럼 고립된 땅을 제외하면, 유라시아 대륙 본토에서 고양이가 특정 야생동물 종 전체를 완전한 멸종으로 몰아넣었다는 명확한 과학적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본다.

그리고 생태환경의 차이에 따른 먹이 조건은 이 차이를 더 벌린다.

섬의 들고양이에게는 밥 주는 사람이 없다. 사냥이 곧 생존이다. 반면, 도심의 길고양이는 사람과 함께 얽혀 산다. 급식소가 있고 음식물 쓰레기가 있다. 고양이의 사냥 행동이 배고픔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지만, 안정적 먹이가 있으면 사냥 압력이 낮아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실제로 2021년 국제 학술지 Current Biology에 실린 영국 엑서터대 연구진의 실험에서는, 고단백 사료를 충분히 제공한 고양이가 야생동물을 물어 오는 횟수가 약 36% 감소했다.

생존을 위해 사냥이 기본값인 섬과, 사람과 공존하며 사냥 압력이 낮아진 도심을 같은 자로 재는 것부터가 전제의 오류다.

그는 가장 취약한 섬의 사례를 근거로, 생태 구조가 전혀 다른 대륙 전역의 살처분을 정당화한다. 마라도가 문제라면 마라도에서 고양이를 옮기면 된다. 실제로 그런 국지적 반출은 이미 이루어졌다. 섬의 문제에는 섬의 해법이 있는데, 그것을 교묘하게 전국 길고양이 살처분의 명분으로 삼는 것이다.

3. 죽여도 해결되지 않는다.

설령 목표를 ‘개체 수 감소’ 하나로 좁혀도 살처분은 실패한다. 한 구역의 고양이를 없애면 빈 영역과 남은 먹이를 따라 인접 개체가 유입되고, 살아남은 개체의 번식률이 반등한다. 죽여도 원위치로 돌아온다. 유해조수 관리학에서 확립된 현상인 이른바 ‘진공효과(vacuum effect)’이다.

더 큰 역설도 있다.

고양이를 급격히 제거하면 그동안 눌려 있던 쥐가 폭증한다. 실제로 남극해의 ‘매쿼리섬(Macquarie Island)’에서는 고양이를 완전 박멸했더니 토끼와 쥐의 개체 수가 폭발해 섬의 식생과 바닷새 둥지를 오히려 더 파괴한 생태 재앙이 보고됐다(소위 ‘중간포식자 해방’). 새를 살리자고 포식자를 없앴더니 포식자의 먹이인 쥐가 새알을 털어가는 현상이 급증한 것이다.

그는 “중성화는 개체군의 75% 이상을 해야 효과가 난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단기간에 개체군의 최소 71~75%를 중성화해야만 실제 감소세로 돌아선다는 수리생물학 모델링 연구 결과를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중성화의 실효성을 위하여는 개체군의 75%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하 커버리지가 아무 효과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특정 구역을 집중 관리(zone TNR)했을 때 개체군이 안정화된다는 연구는 다수 존재한다. 즉, 낮은 커버리지의 올바른 결론은 ‘TNR 폐기’가 아니라 ‘커버리지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연 200억 원 예산 낭비” 프레임도, 포획·안락사·시설·인력·소송·사회 갈등까지 떠안아야 하는 살처분 체계가 더 경제적이라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4. 새를 정말 죽이는 것들

그렇다면 새는 무엇이 죽이는가. 그가 근거로 든 2013년 스미소니언 보전생물학연구소의 연구(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는, 미국 내에서 자유 방목 고양이가 연간 14억~37억 마리의 새를 사냥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유명한 수치를 강조하면서도 중요한 맥락은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해당 수치는 전수조사 결과가 아니라 소수의 표본에 전국 고양이 수와 사냥 확률을 곱해 얻은 ‘외삽 추정치’에 불과하다. 또한, 통계에 잡힌 사냥 건수의 약 70~80%는 완전히 야생화된 들고양이(feral cat)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사람의 관리를 받는 도심 길고양이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얼마나 죽였는가’와 ‘개체군이 줄었는가’는 다른 문제다.

자연의 포식 상당수는 어차피 죽을 약한 개체를 걸러내는 보상적 사망이어서 개체군 총량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전 세계 조류 위협의 제1원인을 언제나 ‘인간 활동에 의한 서식지 파괴와 단편화’로 규정하며, 한 연구는 서식지 상실과 훼손이 멸종위기 조류의 절반 이상을 위협하는 반면 고양이를 포함한 도입종의 몫은 6%에 그친다고 봤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새를 대량으로 죽이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유리창”이다.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인공 구조물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 새가 연간 약 800만 마리(하루 평균 약 2만 마리)에 이른다. 여기에 개발과 간척, 농약, 로드킬, 송전선, 기후변화가 더해진다.

모두 인간의 체제다.

그런데 구조적 모순을 건드리는 일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항선이 가장 낮은 타깃을 찾는다.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무력한 객체, 곧 고양이와 캣맘이다. 자신들이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는 부담스러운 죄책감을, 고양이라는 단일 대상을 축출함으로써 상쇄하려는 것이다. 이 편리한 ‘심리적 환전’ 구조야말로 모순투성이의 주장이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소비되는 핵심 배경이다.

5. 애초에 ‘외래종’이 아니다.

“외래종 고양이가 왜 천연기념물보다 우선하느냐”라는 반문은 생태적 무지와 이분법적 오류를 동시에 드러낸다. 먼저, 고양이는 억지로 들여온 생태계 교란종이 아니다. 1만 년 전 농경 문명과 함께 인간 곁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공생의 산물이며, 도시라는 인공 생태계는 이들의 오랜 서식지다. 그리고 천연기념물 보호와 길고양이 보호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천연기념물이 생태적 희소성으로 인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면, 길고양이는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다. 가치의 척도가 다를 뿐,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쪽을 살처분해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연으로 되돌리자’라는 주장을 끝까지 밀고 가면, 천연기념물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세워진 아파트와 유리 마천루부터 철거하는 것이 우선이다.

6. 화살은 늘 아래로 향한다.

그가 수리부엉이가 고양이를 사냥하는 영상에 붙인 제목은 “생태계 정상화의 신 그저 빛”이었다. 포식 장면을 신이라 부르는 중립적 생태학자는 없다.

표적의 위계를 보면 방향이 드러난다. 맨 위에 새가 있고, 그 아래 새를 위협하는 고양이가 있으며, 맨 아래 그 고양이를 살리는 사람이 있다. 화살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 향한다.

그는 자신을 10년 차 집사라 소개한다. 그런 그가 요구하는 첫번째는 “길고양이 먹이 주기 금지”다. 생명보다, 그 생명을 먹이는 손길을 먼저 끊으라는 것이다. 집 안의 고양이는 가족이라 부르면서, ‘생태계’를 위하여 담장 밖의 고양이는 굶겨 죽이자, 잡아 죽이자고 말한다. 진짜 반려의 감수성은 담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참이라면서, 담장 밖의 생명은 먹이 받을 자격도, 살아 있을 자격도 없다는 그 위선, 인간의 관리 바깥에 놓인 생명에 대한 불관용의 기저에 놓인 그의 심상이 ‘길고양이 혐오’는 아닌지 궁금하다.

내심은 증명할 수 없고, 혐오는 각종의 가면과 다양한 층위를 갖고 포장된다. 고양이와 캣맘이 싫다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면 이는 배타적 혐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를 ‘생태계 보전’이라는 거창한 구호로 포장하는 순간, 혐오는 가려지고, 그 위에서 각종 사이비 담론이 진행된다. 그 sbs 방송처럼.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은, 효과도 없고 대안도 멀쩡히 있는데 죽이는 것을 ‘유일한 답’이라 단정하지 않는다. 죽이는 것은 쉽고 공존은 어렵다. 그리고 대개, 어려운 쪽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