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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회 대신 기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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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회 대신 기년회

2007.12

김창준 (애자일 컨설팅 대표)

들어가는 글

요즘 여기 저기서 망년회 날짜 잡는다고 분주하다. 그렇다. 또 한 해가 넘어가고 있다. 뿌듯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허망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대부분은 아쉬운 마음이 한 구석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심려할 필요 없다. 필자가 늘 말하듯, 경험의 가치는 그 경험이 끝난 후에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7년은 공식적으로 아직 며칠 남아 있지 않은가.

이번 글에서는 이렇게 한 해가 저무는 것을 아쉬워하는 개발자[1]가 연말에 해보면 좋을 것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일명 개발자를 위한 막판 뒤집기 전략.

요리법

우선 막판 뒤집기 요리법 하나를 소개하겠다. 필자가 즐겨 먹는 요리 중 하나다. 요리 제목은 올해의 베스트 3[2].

우선 재료 소개:

다음은 요리 순서다.

  1. 인덱스 카드와 펜을 준비한다.
  2. 2007년 1월 1일부터 다이어리나 일정표, 혹은 이메일 계정 등을 천천히 훑으면서, 내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당했는지 되짚어 본다.
  3. 혹시 그 때 어떤 교훈을 얻은 것이 있다고 느껴지면 인덱스 카드 한 장을 빼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적는다(이것을 "사건"이라고 하자). 이 사건의 폭은 생각보다 넓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것도 사건에 해당한다.
  4. 카드 반대면에 교훈 내용을 간략히 적는다. 격언이나 시구처럼 짤막하면서 울림이 있으면 더욱 좋다.
  5. 교훈 내용을 적은 면 상단에 다른 색 펜으로 제목을 단다. 제럴드 와인버그(Gerald Weinberg)처럼 무슨 무슨 법칙이라고 이름 짓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다. 나에게 의미있고 기억하기 좋으면 그만이다.
  6. 인덱스 카드 한 장에 교훈 하나씩 기록하는 식으로 계속 날짜를 넘어가면서 2번부터 다시 반복한다. 그렇게 해서 오늘 날짜가 될 때까지 거슬러 온다. 만약 이미 교훈 카드를 만들었는데 그 이후에도 비슷한 교훈을 느꼈다면 뒷면에 새 사건을 추가한다.
  7. 책상 위를 깨끗하게 치운다.
  8. 모인 카드들을 늘어 놓는다.
  9. 중요도, 깊이, 혹은 잠재성 등의 순서로 정렬을 한다. 더 중요하거나 더 깊이가 있는 교훈은 왼쪽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것은 오른쪽으로 간다.
  10. 제일 왼쪽에 있는 세 장의 카드를 뽑는다.
  11. 카드를 예쁘게 꾸민다. 색깔도 넣고 그림도 그려보자. 추상화된 기호를 그려 넣어도 좋다.

식사법

자 이제 맛있게 먹을 차례다. 이 요리의 식사법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우선 개인 식사법.

  1.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그 교훈들을 적용하고 있는지 묻는다.
  2. 그리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3. 내년에는 이 교훈을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해 보고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신에게 약속한다.
  4. 세 장의 카드를 코팅을 해서 몸에 부적처럼 가지고 다녀도 좋고, 잠자리 베개 밑에 두어도 좋고, 아니면 책상 머리맡에 붙여 놓아도 좋다. 한 동안 내 몸에서 가까이 해보자.

여럿이서 먹을 수도 있다.

  1. 친구, 동료들을 모은다. 나와 분야가 같아도 좋고, 달라도 좋다.
  2. 각자 개인적으로 요리(위에서 말한 교훈 카드 세 장)를 준비해 오도록 한다. 각자 자기 음식을 위 개인 식사법에 따라 미리 맛보고 오는 것도 좋다.
  3. 올  때에 음식을 프레젠테이션으로 보여줄 수 있게 준비해 오는 것도 좋다.
  4. 돌아가면서 각자 자신의 요리 자랑을 하고 남들은 시식한다.
  5. 질문도 하고 토론을 해도 좋다. 하지만 한 사람씩 시간을 배정해 놓고 그 시간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사람에 10분을 넘기지 않는 것을 권한다.
  6. 한 바퀴 돌고 나서 시간이 더 된다면 내년 계획을 공유하는 것도 좋다.

여럿이 먹을 때는 혼자서 먹을 때보다 장점이 많다. 장점 설명은 필자가 12월 21일 진행한 송년회 소개글을 인용하는 걸로 대신하겠다.

각자 4분간의 발표를 준비해옵니다(ppt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1년 동안 자기가 얻은 교훈, 깨달음, 성공의 경험, 통찰 등을 돌아가면서 발표합니다. 초점은 실패와 괴로움보다는 성공과 즐거움, 배움에 맞추면 좋겠습니다. 서로 자극을 받고 격려하며 내년 한 해를 희망차게 시작할 에너지를 수혈받는 자리입니다.

기년회를 통해서 크게 보면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자기 경험을 반성해서 재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신기한 것은,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을 경험을 다시 되새김질 해보게 되면 깨닫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머리가 정리되어야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머리를 정리하게 해준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번째는 남들로부터 자극입니다. 통상 냉소적이고 패배주의에 물든 사람으로 포위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뭔가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품었다가도 금새 말라 비틀어지기 쉽상입니다. 하지만 기년회 자리는 다릅니다. 남들이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성공을 했고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듣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긍정적 에너지 전도가 됩니다.

만약 기년회를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여러분이 "그래, 올해 나는 이런 교훈을 배웠구나, 내년에는 이것이랑 저것을 꼭 해보고 싶다, 재미있겠다"하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뜨뜻해 진다면 송년회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안하고 뜻깊은 기년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독자들은 기년회라는 단어가 생소할 것이다. 그럴만 하다. 필자가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한 해를 잊는다는 뜻의 망(忘)년회가 아니라 기억한다는 뜻의 기(記)년회다.

기년회는 여러면에서 망년회와 대비된다. 망년회의 거울상이라고 볼 수 있다.

망년회

기년회

끝나면 뻗어버린다

끝나고 나면 힘이 난다

술을 많이 먹는다

술을 안 먹는다

통상 평일에 한다

통상 일요일에 한다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난다

아침에 시작해서 낮에 끝난다. (따라서 하루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요일의 반나절을 또 즐겁게 살 수 있다.) 

직장 동료나 동문, 친구들과 함께 하고 가족이나 애인은 빼놓고 한다

가족이나 애인도 함께 한다

시끄럽고 어두운 곳에서 한다

조용하고 밝은 곳(특히 빛이 두 방향에서 비치는 알렉산더의 패턴을 따라)에서 한다

대화 자체가 별로 없거나, 있어도 바로 옆자리 사람하고만 대화한다

여러 사람과 돌아가며(테이블을 옮겨가며) 대화한다

대화가 가볍고 겉돈다

대화가 진지하고 울림이 있다

무엇보다도 1년을 잊어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고 더 잘 기억하게 되고 다음 해의 다짐을 하게 된다.

되돌아 보기

기년회 같은 활동을 일컫는 일반 용어가 있다. 영어로는 리트로스펙티브(retrospective)라고 한다. "뒤"를 뜻하는 retro와 "보다"를 뜻하는 spective가 합쳐진 낱말이다. 우리말로는 회고나 반성이 적당하다. 회고의 중요성은 필자의 블로그에서 몇 번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이름만 보고 회고를 우리가 늘 하는 주간 업무 보고 회의 등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양자는 글자 그대로 천지차이다. 업무 보고의 스냅샷은 각자 자기 업무노트만 쳐다보고 있고 간혹 조는 사람도 있고 유일하게 당장 발표하는 사람과 중앙에 앉은 팀장만 집중하는 눈치지만, 회고의 스냅샷은 모든 사람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몸을 움직이고 대화하고 공유하는 분위기다.

회고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 두 권의 책을 참고할 것을 권한다. Project Retrospectives: A Handbook for Team Reviews, Agile Retrospectives: Making Good Teams Great(이 중 두 번 째 책은 곧 번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다) 두 권 모두 적극 추천하는데, 전자는 회고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책이고, 후자는 실용적인 면이 강하다.

주기에 대해 한마디. 기년회는 1년 단위로 일어나는데, 회고에는 그 주기가 한 달짜리도 있고, 일주일짜리도 있다. 심지어는 한 시간도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회고는 애자일 방법론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자주 해서 피드백을 빈번히 얻는 것이 효과가 좋다. 애자일컨설팅에서는 업무가 끝나면 매일 회고를 하고, 또 매주 하는 회고가 있으며, 매월 하는 회고도 있다. 심지어는 한 시간마다 한 번씩 회고를 할 때도 있다. 일이 진행이 잘 안 되거나 리스크가 크면 주기를 더 짧게 하는 편이다 --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안 하고 자기가 한 일을 되짚어 보지 않고 현재 일에만 몰두하는 시점일수록 비생산적으로 일하고 있을 때가 많다. 회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1]필자의 여타 글들과 마찬가지로 명목상으로는 개발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하나, 십중팔구 모든 사람이 읽고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2]변형으로 3-2-1 기법이 있다. 올해 뿌듯한 것(한 것, 얻은 것, 배운 것 등) 3가지, 내년에 뿌듯하고 싶은 것 2가지, 내년에 꼭 기억하고 싶은 올해의 교훈 1가지를 뽑고 사람들과 나눈다.